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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묘공당 대행선사

한 점의 불씨로 만 가지 꽃이 피도다

대행 선사께서는 1927년(불기 2471년) 정묘년丁卯年 음력 1월 2일(양력 2월 3일) 지금의 서울 이태원에서 부친 노백천盧伯千 공과 모친 백간난 님의 3남 2녀 중 셋째인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스님의 속성은 교하交河 노씨盧氏이며 오른쪽 발목 부위에 붉은 반점이 있어 속명俗名을 점순点順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던 명문 가문의 후손이라 비교적 넉넉한 가세였으나,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된 후 부친 노백천盧伯千 공께서 항일抗日 의병義兵에 참여하시는 등 일제에 항거하시다가 모든 재산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바람에 어린 시절 스님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혹독한 고난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일곱 살의 스님에게는 급변한 생활 환경도 힘에 겨웠으나, 모든 것을 잃고 파탄에 빠지신 부친을 대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부친께서는 어린 스님을 혹독하리만큼 엄하게 다루었으며, 스님은 하루하루 힘겹고 두려운 일상을 보내야 했습니다.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스님은 점점 자연에 동화되었고, 내면의 부父를 그리워하며 마음을 안으로 집중하게 되어 자연스레 깊은 내면의 길에 들어서게 되셨습니다.

또한 너나 할 것 없이 헐벗고 굶주려 고통을 겪는 이웃들의 실상을 보면서 비록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에 대한 진한 아픔을 느껴 생에 대한 큰 의문을 품게 되신 바, 스님의 나이 9세 때 본연本然의 심지心地에서 첫 소식을 접하시니 매우 희유한 일이셨습니다.

1940년 14세 때 모친을 따라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부근에 살던 외삼촌 댁에 몇 달 머물면서 한암漢岩 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으셨습니다. 한암漢岩 스님께서는 어린 스님을 측은히 여기시고 친할아버지처럼 너그럽게 대해 주셨다고 스님께서는 회고하셨습니다. 산중 수행을 해나가시던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19세 되시던 때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나 화장사華藏寺 부근 등 흑석동 인근 산을 도실 때나 내면內面에 집중하는 일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한암 스님을 찾아가 출가의 뜻을 세우시니 때는 1950년, 스님의 나이 23세이셨습니다.

그 후 스님께서는 쫓지도 막지도 거스르지도 않으시며 일체를 다 내던지고 물 흐르는 대로 응하시며 공부하셨습니다. 6·25 사변이 터지자 상경하시어 식구들과 함께 잠시 피난살이를 하시다가 또 산에 드셨으며, 인연이 닿으면 다시 산을 내려 오셨습니다.

30대 초반 무렵 문득 일대사一大事의 중대한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자성自性의 발길을 따라 걸음을 떼시니 화장사, 국립묘지, 한강변, 관악산, 광나루, 헌인릉, 청계산을 거쳐 남한산성, 경기도 이천, 강원도 춘천, 영월, 충북 제천 백련사白蓮寺에 이르기까지 수 년의 시간에 이르는 만행이었습니다.

그 때의 고행은 필설로 다 옮길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산에서 산으로 돌며 몸을 돌보지 않아 누추하고 헤진 차림으로 다니시다가 광인狂人 취급을 받기도 하시고, 때론 빨치산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시는 등 수없이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또한 빈사 상태에 빠져 산길에 쓰러지기를 수십 차례, 그 때마다 죽음의 고비에 처하셨으나 하루 콩 몇 쪽, 혹은 열매 한 알, 나무뿌리 등으로 공양하시며 때로는 지쳐 산길에 쓰러지고 때로는 동상 걸린 맨발로 눈 쌓인 산길을 걸으며 그간 공부해왔던 하나 하나를 점검하고 실험하고 적용하며 조목조목 실천하고 확인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기나긴 길을 걸으시다가 그때 그때 인연 닿는 대로 병고액난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문득 대자비의 마음을 일으키시어 살펴주곤 하셨습니다.  손에 닿는 대로 길가의 이름 모를 풀이나 나뭇잎 등을 뜯어 환자에서 다려 먹으라 하시거나 무심無心의 마음을 내주시니, 스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이적을 행하는 분으로 회자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스님께서는 “이는 나의 힘이 아니고 사람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자성불自性佛의 위신력威神力이라, 스스로에게 갖춰진 능력으로 이루어진 공덕功德이니 스스로의 자성自性에 감사하라.” 하셨고, “모름지기 사람마다 자신의 근본根本을 믿고서 모든 일을 그에 맡기고, 항상 주처主處를 관觀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선원을 세우신 후 신도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여러분로 인해서 나도 배우는 게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은 내가 어찌 그 도리를 알았겠습니까? 나는 저 산천초목, 풀 한 포기, 물이 흘러가는 걸 봐도 ‘하! 너희들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 도리를 알았을까? 너희들이 다 스승이고 돌 하나 스승 아닌 게 없구나! 천칠백 공안이라고 예전에 선지식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지마는 화두 아닌 게 없고 천칠백 공안 아닌 게 하나도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내가 어찌 둘이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겠습니까? 부디 공부 열심히 하여 멀고 가까움이 없이 전 세계의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깨우고,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고, 그렇게 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이어져서 부처님의 진실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도리요, 한마음의 도리일 것입니다.”


1965년 스님께서 39세 되시던 해, 원하는 바마다 응해주어도 그릇이 비면 또 찾아와 채워달라고 애원하는 미혹한 중생들을 보시고는, 각자 자신마다 지니고 있는 내면의 영원한 보물을 알지 못해서는 세세생생 동냥만 하는 중생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을 가엾게 여기시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면의 근본을 가르쳐주고자 하산하셨습니다. 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큰 은혜를 입고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다운 진리의 가르침에 인연 닿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바, 이에 불자들이 스님께 땅을 시주하면서 도량 건립을 간청하는지라, 스님께서는 1972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한마음 선원禪院>을 세우셨습니다.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선원禪院으로 몰려들어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잊었던 참마음을 문득 깨달아 생의 보람을 찾았으며, 출가出家하여 스님의 법法을 따르고자 하는 출가 제자들의 수도 급증하여 진리의 법도량法道場으로서의 장엄한 면모가 갖춰지니, 스님과 스님의 법제들의 가르침을 좇아 더 많은 이들이 감로수의 법에 인연되었고 일대사一大事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감에 따라, 2차례에 걸쳐 선원禪院을 중축하여 3천여 명이 동시에 법회를 볼 수 있는 규모로 불사가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스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자 몰려드니 각 지역에 속속 지원支院들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지원支院들은 스님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지역의 불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더 가까이서 받들고자 스스로 발심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니, 봄이 오면 꽃이 만발하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무위無爲의 불사佛事였습니다.

자생적으로 국내에서 지원支院이 늘어가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미국의 불자들도 호응하니 1987년 6월 캘리포니아 모건힐에 첫 국외지원이 생겼고, 아르헨티나, 태국, 독일, 브라질에 지원이 개원하는 등 미국을 비롯한 국외의 교포 불자들과 현지 불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참다운 법法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스님과 인연된 수많은 사람들 중 작든 크든 한두 가지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스님과 진정 둘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스님의 삶이란 스님과 인연된 수많은 신도들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생무생 중생들의 모든 삶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덕이 있다면 모든 중생들의 공덕이요, 깨달음이 있다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체는 둘이 아니었고 스님은 진실로 그렇게 이름 없는 이름으로서 발 없는 발로 길 없는 길을 걸은 바 없이 둘 아닌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몸을 세우지 않고도 수천 수만으로 화하여 중생의 원에 따라 나투니 실로 스님이라고 지칭할 것도, 스님의 삶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기쁘게 삽시다. 싱그럽고 건강하게 삽시다. 여러분이 기쁠 때 나도 기쁘고 여러분이 슬플 때 나도 슬프니 그것은 우리가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걸어 갑시다. 영원토록 같이 걸어 갑시다. 헤어진다 해도 마음이 하나일 때 그곳에 헤어짐은 없습니다. 설령 죽음이 갈라놓는다 해도 한마음에서는 이별이 없습니다. 기쁘게 삽시다. 여러분이 구김살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아픔이라도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짊어져 주려고 한다 해도 그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부처님, 어떤 보살님, 어떤 선지식, 어떤 구세주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닦아 여러분 모두가 영원한 대자유인으로서 당당하고 싱그럽기 바랄 뿐입니다. 냇물이 흘러서 언젠가는 바다에 이르듯 누구든지 언젠가는 성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또한 평등하시어 잘난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이거나 인연 닿은 이들 모두를 높고 낮음 없이 나처럼 평등하게 대하시어, 못난 이가 오면 못난 이가 되어 주시고 잘난 이가 오면 그에 맞추어 잘난 이가 되어 주시니, 스님의 면목面目을 아는 이들이거나 모르는 이들이거나 모든 이들이 스님 앞에서 벗처럼 평안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하신 묘법妙法의 이타행利他行은 불가사의하여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으니, 무생無生 유생有生 미물에서부터 하나 하나의 생명들과 나라와 지구, 보이는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의 한량없는 마음들을 한마음으로 품으시는 스님의 동체대비심으로 인하여 스스로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밝은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영원한 한마음을 깨달아 공생共生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共食하며 만법萬法을 들이고 내는 법계法界의 주인임을 체득하였으니, 스님께서는 스스로가 영원히 밝은 부처임을 깨닫게 이끌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스님께서 일평생 한마음으로 염원한 것은 모든 생명들이 ‘대자유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 종종 신도들에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 역시 자유인으로 패기 있고 싱그럽게 살라는 뜻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스님이 생애를 바쳐 중생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은 ‘실천’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일대교一代敎 팔만사천 법문을 한 단어로 말하여 ‘마음’이라고 한다면, 스님이 일생을 통해 행으로써 보여주며 강조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실천’이라고 할 것입니다. 스님이 가르치고자 한 공부는 각자 한마음을 발현하여 만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공부지, 자기 하나 안심입명에 들고자 하는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이 ‘한 점의 불씨로 만 가지 꽃이 피도다.’ 한 뜻이 그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지나온 삶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없는데 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 한 바닷가에 수레바퀴가 돌고 있을 뿐이다.”

하경목  btnnews@b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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