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역사의 전통사찰, 일제하 불교개혁과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던 개운사(開運寺, 서울 성북구 안안동5가)에 연유해 이름지어진 ‘개운사길’이 사라진다. 대신 친일파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의 호를 딴 ‘인촌로 23길’로 변경된다.

새주소 전환 사업이 한창인 가운데 서울시는 지난해 6월 지하철 6호선 안암역과 개운사 입구를 잇는 ‘개운사길’을 ‘인촌로 23길’로 변경했다. 우편물 배송을 위한 개별 주소변경은 오는 7월 29일 개정이 완료된다. 이번 개정 도로명은 최소 3년 동안 유지된다.

△빨간 줄로 표시된 일대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개운사길'에서 '인촌로23길'로 변경된 길.  사진=다음 위성지도

그동안 서울시는 2001년 새주소 전환 사업을 하면서 본래 명칭이 없던 마을길을 인근 유명 사찰인 개운사의 이름을 따 ‘개운사길’로 정하고 2010년까지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지명이나 지역민에게 익숙한 건물 명칭을 따 거리명을 지정하는 게 상식적인데도 600년 된 사찰이 있는 기존 도로명을 없애고 논란이 있는 인물의 호를 거리명으로 지정하는 것을 놓고 불교계에선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중앙승가대 관계자는 “서울시가 내세운 이번 도로명 변경이 길 찾기의 편리함과 국제도시 서울 600년의 역사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반영하려 한다면,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의 역사적 배경이 된 개운사를 오히려 더 부각시켜야 하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개운사와 고려대로 갈라지는 안암역 사거리의 이정표.

도로명 개정을 추진되는 동안 서울시와 성북구청은 해당 도로명의 주체인 개운사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개운사 주지 범해스님은 “최근 도로명 변경 내용을 담은 서울시 주민 홍보 우편물을 받고서야 가로명 변경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불교 지우기’ 논란이 일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KTX 울산역의 통도사역 부기를 개신교단체의 항의를 받아 삭제한 사건도 있어 의도적인 움직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 행정과 주소전환팀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주선인 간선의 명칭을 중심으로 종속도로의 좌우측 지선도로는 홀짝수 가로명이 주어지는데 ‘개운사길’은 작년 4월 22일 ‘인촌로 23길’로 개정됐다”고 확인했다.

그는 “종속도로의 경우 구청에서 2주간 주민공고 후 다른 의견이 없으면 서울시가 고지한 도로명이 그대로 지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남대문처럼 역사적 건물이나 지명을 가진 도로이거나 2개 구청이 접한 도로의 경우 구청장이 명칭변경의 권한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구청장의 적극적인 의지만 있다면 기존 도로명을 지키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북구청 지적과 담당자는 “개운사 의견을 청취하지는 않았고 주민들이 길 찾기에 불편함을 준다는 의견이 있어 ‘인촌로 23길’로 변경했다”며 “1991년 ‘이공대 뒷길’에서 개명된 ‘인촌로’의 역사가 깊고 그 길에서 나눠지는 마을길도 ‘인촌로’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사람들이 혼란을 덜 겪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일반국민들은 대부분 길 이름보다 동네 이름이나 유명한 건물, 유적지 등의 이름으로 찾는다는 점에서 성북구청 담당자의 해명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유서 깊은 사찰인 개운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번 도로명 변경은 오히려 혼란을 더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개운사] 조선 개국하며 무학대사 창건 안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개운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현재는 김포에 위치하고 있지만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다. 이 절은 조선 초 태조 5년(1396)에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동대문 밖 5리 정도되는 안암산 기슭,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정조 3년(1779) 5월에 정조의 후 궁 원빈(元嬪)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하고, 명인원(明仁圓)이 세워지자 인파당(人波堂) 축홍(竺洪)스님이 영도사를 동쪽으로 몇 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절을 옮겨 지었다고 하였으나 '사기(寺記)'라는 문헌에는 영조 6년(1730)에 영도사가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도사가 개운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개운사는 20세기 이후에 한국 교육불사와 불교의 진보적인 운동을 주도해 왔다. 1926년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이 머물었고, 이절의 암자인 대원암에 탄허(呑虛)스님이 머물면서 역경(譯經)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 절은 현재 조계종이지만 최근까지 태고종에서 관리하였으므로 1955년에 대처승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全國布敎師大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81년부터 중앙승가대학이 이곳을 교육도량으로 사용하면서 현대사 속에서의 개운사 전통을 꽃피우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조선말 고종 10년(1873)에 명부전을 세우고 나서 7년 후인 1880년에는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현재 대대적인 중건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현대식 건물로 지은 지상5층의 중앙승가대학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절의 암자로서 대원암(大圓庵)과 보타사(普陀寺:안암동5가 157)가 절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근 보타사 대웅전 뒤의 암벽에 5m크기의 마애석불(磨崖石佛)이 발견되었으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개운사 홈페이지

조용수ㆍ윤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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