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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하면 뭐해요~!"

국악인 신영희 명창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난 신영희 명창은 이미 어린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한다. 11살 때부터 판소리를 시작한 그녀는 판소리 이외에 다른 것은 단 하나도 잘해내지 못할 정도로 판소리에만 천부적인 재능을 탔고 났다.

신영희는 14살 때 ‘창극 심청’의 심청으로 무대에 서 이미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날렸다.  아버지는 딸이 소리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 본 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남녀가 유별했던 시절. 아버지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아들인 오빠였지만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딸과 겸상을 했을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

그러던 아버지가 16살 때 운명을 달리했다.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오빠의 학업을 중단 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영희는 학교를 중퇴했다. 한 푼이라도 돈을 벌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버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16살의 한 가정의 실질적 가장이 된 그녀. 신세한탄 한번 할만도 한데 그녀는 부처님이 정해 주신 길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늘이 준 재능으로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신영희는 어렸지만, 그 시절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돈을 벌었다고 추억했다.


△ 항상 공연 전 명상을 통해 집중력을 키우고 무대에 올라간다는 신영희 명창. 공연 전 명상은 20세 때 무대 뒤에서 졸다가 막상 무대에서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곤욕을 치룬 이 후부터 생긴 습관이라고 한다.

신영희는 23살에 목포, 광주, 서울 등 1년에 4개 대회를 석권하고 32세 때 목표에서 완창을 했다. 옆에 얼음덩어리를 놓고 쉬지 않고 소리를 했다. 5시간 30분. 그녀의 첫 완창이었다.

그 시절에는 유명한 소리 선생님들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지금은 제자가 선생을 찾아가 돈을 주고 과외 받는 식이지만 그 때는 선생님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지역에 묵으면 그 지역의 제자들이 찾아가 수발을 들며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74년, 김소희 선생이 아픈 몸을 목표에 왔다. 신영희는 김소희 선생을 모시고 집에 데리고 가 정성스레 수발을 했고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선생은 신영희에게 서울로 함께 올라가자 권유 했다. 김소희 선생과 함께 서울에 상경하여 2년 간 함께 살면서 선생에게 소리를 다시 배웠다. 그 시절이 명창 신영희에게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신영희는 국악인이라는 타이틀에 앞서 대중들에게는 ‘쓰리랑 부부’로 얼굴을 알렸다. 이마에 검은색 일자 눈썹을 붙인 김미화와 김한국이 ‘음메, 기죽어~!’, ‘음메, 기살아~!’ 하던 그 코미디 프로에 신영희는 북을 들고 가락을 맞췄다. 국악인이 코미디 프로에 출연하는 것은 당시로써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87년 봄, 그녀에게 '쓰리랑 부부'의 섭외전화가 왔다. 생각도 못 한 전화에 계속 고민을 하던 중, 그녀의 친구인 성악가 조수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국악이 보급이 안 되지. 방송 나가~!”

국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결심한 방송출연이었지만 항의도 많았다. 국악을 오염시켰다며 국악계 퇴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김영희는 지금도 그때의 결정은 옳았다고 말한다.

“아직도 질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국악인이 아니라 방송인이라고.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국악인이예요.
우리끼리 하면 뭐해요~! 국악은 자꾸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해요.”

쓰리랑 부부 4년 출연. 그 4년이 서서히 국악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92년, 영화 ‘서편제’가 흥행을 하면서 지금의 국악시대가 완성되었다. 신영희는 국내 방송을 넘어 일본, 영국 방송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타 분야의 음악 무대를 통해서도 국악을 알렸다.

사람들은 소리꾼들에게 ‘득음’에 대해 많이 질문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득음’은 깊은 산자락 계곡 밑 폭포를 맞으며 혹은 바위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피를 토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득음’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득음, 득음 하는데 나는 그런 건 없다고 봅니다. 득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다만 득음의 길로 가다가 이 세상의 생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신영희 명창의 별명은 '팥쥐엄마'. 평상시 대화할때는 너무 온화하고 아이같지만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만큼은 무섭게 교육한다. 위계질서가 살아 있어야 맥이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그녀. TV 출연으로 국악을 오염시킨다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우리 후학들에게는 공연의 기회를 넓혀주어 스타도 만들어주고 좀 더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몸이 악기이고 울림통인 소리꾼들에게 체력은 매우 중요하다. 좋은 음식을 잘 먹는 것은 모든 소리꾼들이 말하는 첫 번째 체력 유지 비법. 신영희는 완창을 하는 5시간 30분 동안 혹시라도 화장실에 가고 싶을 까봐 며칠 전부터 아예 수분기를 줄여 컨디션을 조절한다고 한다. 처음 소리를 배울 때부터 남자 선생님들에게 통성으로 소리를 배워 가성을 사용하지 못해 항상 체력이 달린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것만이 그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이라고 말한다.

신영희는 본인의 성격을 체념이 빠른 성격이라고 말한다. 체념을 하지 않으면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일에도 남을 탓하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제자에게도 미안한 일이 생기면 바로 ‘미안하다’고 인정하고 사과한다.

신영희와 불교의 인연은 극적이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 여러 종교를 다 다녀봤던 그녀. 어느 날, 섬의 바닷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부처님 좌부상을 줍게 되었다. 좌부상을 주워든 순간, 신영희는 이것이 부처님의 계시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운명처럼, 그렇게 인연이 되어 불제자가 되었다.

행복은 내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신영희 명창.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잘 살기를 원치 않아요. 다만 아픈데 없이 어느 날 코 골며 자다가 갔으면 좋겠어요.”

내년은 신영희가 국악인으로 무대에 오른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 칠순을 맞이하였지만 칠순 잔치는 내년의 소리인생 60년으로 대처하려 한다. 전문 국악인을 아니지만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하는 딸과 손녀가 함께하는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그녀.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져 대중들에게 국악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무대를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BTN 이진경  btnnews@b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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