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 수호 외치면서 도로명에 담긴 역사·문화 외면

‘개운사길’이나 ‘화계사길’과 같이 도로명 변경과 관련해 조계종 총무원과 해당 사찰의 무관심이 오히려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도로명에 담긴 역사와 문화의 중요성을 살피지 못하면서 민족문화 수호를 외치는 조계종의 신뢰에 금이 갔다. 중앙종무기관의 역할과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찰과 중앙종무기관과의 협조체계에 빨간불이 켜져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안이다.

◆진관사·법주사·전등사 등 작년에 변경신청

행정안전부와 각 지자체는 2009년 2월부터 새도로명사업을 시작해 2010년 상반기 예비도로명을 공고했다. 이때는 도로명이 미결정 상태였다. 2010년 하반기에 각 지자체는 도로명 결정 고시를 하고 도로명 변경 요청이 있을 경우 주민 의견수렴을 통해 변경했다. 이 기간에 도로명 변경 요청을 했다면 지금과 같이 마찰을 빚지 않고 변경 가능했다는 얘기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길의 경우 이 기간 동안 구두민원만으로도 ‘연서로52길’에서 ‘진관길’로 도로명 변경이 됐다. 조계종 5교구본사 법주사 역시 ‘연송로’에서 변경 신청을 통해 ‘법주사로’로 도로명이 부여되어 공시됐다. 강화도 전등사도 작년 예비고시 기간에 전등사로로 변경했다.

 

△개별 발송된 '도로명주소 고지문'. 새 도로명과 부여 사유, 정정 요청할 수 있는 회신문도 포함되어 있다.

진관사 법해스님은 “작년에 ‘연서로52길’로 도로명이 고시된 후 곧바로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면서 “그땐 변경할 수 있는 시기여서 어렵지 않게 다시 바꿨다”고 말했다.

법주사 종무실장은 “처음에는 정2품송 이름을 딴 ‘연송로’로 도로명이 부여됐다”면서 “작년 가을쯤 ‘법주사로’로 변경을 요청해 변경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총무원과 교구 본·말사는 상황 파악은 물론 정보 공유와 대책이 전무했다. 개별 사찰마다 대응 방법과 시기 등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의견 수렴과 변경 기간을 넘긴 경우가 많다.

‘개운사길’과 ‘화계사길’이 대표적인 예다. 8교구본사 직지사는 이틀 전인 8일에야 ‘북암길’에서 ‘직지사길’로 변경 요청을 한 상태다.

종로구청 새도로명 담당자는 “예비안내문이 나갔을 때는 대부분 민원이 받아들여졌다”며 “오는 6월 30일까지 고시가 완료되기 때문에 지금은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서울시 행정과 관계자는 “그전에는 관심도 갖지 않다가 개별 고시가 되니까 이제와 불만”이라고도 말했다.

새도로명 주소는 7월 29일 전국 동시에 고시가 되면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행정안전부의 새 도로명주소 홍보포스터.

◆정보 공유·상황 파악도 안돼‥예정된 사태
 
도로명주소법 시행령 제7조(도로명의 부여·변경 기준) 1항에는 “지역적 특성, 역사성, 위치 예측성, 영속성, 지명과 지역주민의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정하며”라고 되어 있다.

같은 법 시행규칙 제5조(도로명의 부여ㆍ변경의 세부기준) 3항에는 “도로명을 부여할 때 지명, 마을 이름, 역사적 인물의 이름, 국가보훈기본법 제3조제1호에 따른 희생·공헌자, 유적 및 문화재의 이름, 도로의 위치와 기능 및 시·군·구 이상의 권역을 대표하는 상징성 있는 공공시설물의 이름 등을 반영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도로명 부여 시 지역성과 역사성, 문화재사찰 등을 고려해 사찰명을 도로명에 부여할 수 있음에도 사찰에서 일제고시를 앞두고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 자칫 ‘억지쓰기’나 ‘떼쓰기’로 비춰질 우려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태는 결국 사찰과 총무원의 무관심이 낳은 예정된 사태라는 것이다.

도로명주소법 시행령 제7조(도로명의 부여·변경 기준) 6항과 7항에는 “도로 구간의 폐지나 도로명의 폐지로 사용하지 않게 된 도로명은 그 폐지된 날부터 최소한 5년 동안은 도로명으로 다시 사용할 수 없다”, “고시된 날부터 3년이 지나지 않은 도로명은 변경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오는 7월 29일 새도로명이 일제 고시되고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면 3년 동안은 변경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총무원은 결정고시 된 도로명이 예비고시 된 도로명을 그대로 결정한 것인지, 민원에 의해 변경한 것인지, 변경한 곳이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이러한 업무를 어느 부서에서 처리해야 할지조차 논의가 없는 실정이다.

지난 6월 2일 행정안전부에서 발표한 ‘도로명 변경 요청 추진 현황’에 따르면 2011년 5월 31일까지 총 579건의 도로명 변경 요구가 있었으며, 이중 506건이 변경 완료됐다. 이 자료에 ‘진관길’도 포함되어 있다.

조계종 교구본사 중 사찰명을 도로명으로 사용한 곳은 용주로, 법주사로, 마곡사로, 불국로, 범어사로, 통도로, 고운사길, 금산사길, 백양로, 화엄사로, 송광사길, 대흥사길, 선운사길 등13곳이다.

신흥사는 설악산로, 월정사는 오대산로, 수덕사는 사천길, 직지사는 북암길, 동화사는 팔공산로, 은해사는 청통로, 해인사는 가야산로, 쌍계사는 석문길, 봉선사는 광릉수목원로로 최종 고시될 예정이다.

말사의 경우도 사찰명을 도로명에 사용한 곳이 여럿 있다. 향일암로(여수 향일암), 보리암로(남해 보리암), 낙산사로(양양 낙산사), 내소사로(부안 내소사), 무릉법흥로(영월 법흥사), 전등사로(강화 전등사), 선원사지로(강화 선원사) 등이다.

하경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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